차가운 방정식 終 -탐 갓윈

Day 1,363, 02:04 Published in South Korea South Korea by Carl Jung

소녀는 편지를 내밀었다.

"이 편지들을 책임지고 부쳐 주실 수 있어요?"

"물론."

그는 편지를 받아서 회색 유니폼 셔츠의 주머니 속에 고이 넣었다.

"다음 번 정기선이 오기 전까지는 보낼 수 없겠지요? 스타더스트호가 돌아오려면 오래 걸릴 거구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녀는 계속 말했다.

"너무 오래되면 소홀히 다룰지도 모르겠군요. 이 편지들은 저나 부모님이나 오빠에겐 굉장히 중요한 것이에요."

"알고 있어. 잘 알고 말고. 꼭 전해 줄 거야."

소녀는 시계를 흘끔 쳐다보았다.

"저 시계는 점점 빨리 가는 것 같아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소녀가 물었다.

"게리오빠가 시간 안에 기지로 돌아올까요?"

"그럴 거야. 그 사람들이 돌아올 시간이라고 했으니까."

소녀는 손바닥으로 연필을 굴리기 시작했다.

"제발 그랬으면. 전...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오빠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요. 그러면 아마 덜 외로울 거예요. 날 겁쟁이라 해도 할 수 없어요."

"아니야, 넌 겁쟁이가 아니다. 두려운 거지. 그건 겁내는 것과 달라."

"차이가 있나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차이가 있지."

"난 외로워요. 전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아요.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아무도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전에는 항상 엄마와 아빠가 있고 친구들이 있었는데. 전 친구가 많거든요. 떠나기 전날 밤에도 친구들이 송별파티를 열어 주었어요."

기억해야 할 친구들, 음악, 그리고 웃음. 화상스크린에 비친 로터스 호수는 밤의 그늘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게리오빠도 마찬가지 처지가 되나요? 제 말은, 만일 오빠가 이런 상황에 처하면 도와줄 사람도 없이 그냥 혼자서 죽어야 하냐구요."

"개척지에서는 다 똑같아. 어떤 개척지라도 다 그럴 거야."

"게리오빠는 이런 얘기하지 않았어요. 그냥 봉급이 많아서 보낸다며 항상 집에 돈을 부쳤어요. 아빠의 작은 가게에서 나오는 수입은 식구들이 겨우 먹고 살 정도거든요. 그밖엔 자기 일에 대해서 별로 얘기를 안했어요."

"자기가 위험한 일을 한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고?"

"아뇨. 아마 했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겠죠. 개척지의 위험이라면 아주 재미있고 흥분되는 모험일 거라고 생각했죠. 3차원 쇼에서처럼."

애잔한 미소가 잠시 소녀의 얼굴을 스쳤다.

"하지만 아니에요. 전혀 달라요. 왜냐하면 진짜니까. 쇼가 끝난 뒤에 집에 돌아갈 수 없을 테니까."

"그래. 돌아갈 수 없어."

소녀의 눈은 정밀시계에서 에어록의 문으로, 다시 메모지와 그녀가 쥐고 있는 연필 위로 가볍게 지나갔다. 소녀는 옆쪽에 메모지와 펜을 놓아두려고 약간 자리를 옮겼다. 그는 소녀가 신고 있는 것이 베가 행성에서 만든 진짜 집시 샌들이 아니라 값싼 모조품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버클은 은이 아니라 잘 닦아서 윤이 나는 철이었고 보석들은 색유리였다. `아빠의 조그만 가게에서는 겨우 먹고 살 정도의 수입만이 생기거든요.' 소녀는 학교를 1년만에 그만두고 직업을 얻기 위해 언어학 과정에 등록했을 것이다.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 수업이 끝난 뒤에는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했을 것이다. 스타더스트호에 남아 있을 소녀의 개인소지품들은 집으로 돌려보내지겠지만, 그 소지품들은 결코 비싸지도 않고 지구로 돌아가는 정기선의 창고를 많이 차지하지도 않을 것이다.

"저, 여기......"

소녀가 말을 멈추었다.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소녀를 쳐다보았다.

"여기 춥지 않아요?"

소녀의 질문은 마치 변명처럼 들렸다.

"아저씨는 춥지 않은 것 같아요."

"아니, 추워."

그는 온도계를 보았다. 방의 온도는 정상이었다.

"그래, 평소보다 추워."

"오빠가 늦기 전에 돌아왔으면... 정말 시간 안에 돌아올까요? 날 안심시키려고 그렇게 말한 건 아니죠?"

"오빠는 시간 안에 돌아올 거야. 기지 사람들이 곧 돌아와야 된다고 했어."

화상스크린의 로터스 호수가 그림자 안으로 들어섰다. 호수 서쪽 가장자리의 가늘고 푸른 선도 머지 않았다. 그가 시간을 잘못 추정한 것일까.

그는 주저하다가 애써 입을 열었다.

"오빠가 있는 기지는 몇 분 안에 통신 범위를 벗어날 거다. 오빠는 저기 저쪽, 우덴의 그림자 안에 있어."

그는 화상스크린을 가리켰다.

"우덴이 자전을 하기 때문에 조금만 지나면 통신을 할 수 없게 될거야. 오빠가 곧 돌아온다 해도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 얘기를 거의 못 할거야. 어떻게든 해봐야 할 텐데. 지금 연락을 취해 볼께."

"내가 머물 수 있는 시간보다도 더 짧은가요?"

"그럴 것 같구나."

"그렇다면......"

소녀는 똑바로 서서 차갑게 에어록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게리오빠와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을 넘어 버리면 난 떠나겠어요. 그 뒤까지 기다리진 않겠어요.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겠어요."

그는 할 말이 없었다.

"차라리 기다리지 말았어야 했나봐요. 제가 이기적이었는지도 모르지요. 나중에 아저씨가 오빠에게 말해 주는 편이 더 나았을 텐데."

소녀는 통신이 안 될 것 같다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려는 듯 무의식적으로 변명을 하고 있었다.

"오빠는 아가씨가 기다리기를 원할 거야."

"오빠가 있는 곳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잖아요. 오빠에겐 긴 밤이 남아 있어요. 엄마와 아빠는 내가 돌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직 몰라요. 난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상처를 줄 거에요. 결코 원하지 않았지만.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너의 잘못이 아니야."

그가 말했다.

"결코 너의 잘못이 아니다. 모두들 알고 있어. 이해할 거야."

"처음에 저는 아주 겁쟁이였어요. 죽음이 너무 무서웠어요. 제 생각만 한 거죠. 하지만 이제는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죽는 게 무서운 이유는 내가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에요. 진짜 이유는 모두를 영영 볼 수 없다는 것이에요.
그들의 존재가 내게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는지 이젠 얘기해 줄 수 없어요. 또 나를 위해서 모두가 해 준 일들을 전부 알고 있다는 것도 말해 줄 수 없어요. 지금까지 얘기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이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도 얘기해 주지 못 해요. 난 어떤 것도 말해 본 적이 없어요. 누구든 철이 들기 전에는, 삶이 자기 앞에 있는 모든 것뿐이라고 생각할 때에는 그런 얘기를 하지 않을 거예요. 감상적이고 바보스럽게 들리는 게 두려울 거예요.
하지만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면 완전히 달라지겠죠. 할 수 있을 때 얘기를 하고 싶을 거예요. 여태껏 그들에게 했던 사소한 잘못들에 대해서 모두 사과하고 싶을 거예요. 정말은 그들의 마음을 다치게 하려는 생각은 아니었다고 여태껏 나 스스로도 몰랐지만, 내가 그들을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 꼭 기억해 주기만을 바랄 거예요."

"직접 말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그가 말했다.

"그들은 이미 다 알고 있어."

"그럴까요?"

소녀가 물었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어요? 아저씨는 그들을 모르잖아요."

"아가씨가 어디에 가 있든 인간의 본심은 다 같은 거야."

"그러면... 내가 모두를 사랑한다는 걸... 그 마음을 꼭 전하고 싶다는 것을 알겠지요?"

"그럼, 알고 있지. 오히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이상으로 훨씬 더 잘 알고들 있어."

"난 모두들이 날 위해 해 주었던 일들을 언제까지나 기억할 거예요. 아주 사소한 것도. 지금 내게는 모두 너무나 소중해요. 게리오빠 일이 생각나요. 오빠는 내 열 여섯 번째 생일날 다섯 개의 루비로 된 팔찌를 보내 줬어요. 무척 예뻤어요. 오빠는 한달치 월급을 몽땅 털었을 거예요. 또 내 아기고양이가 거리로 달려 나가 버렸던 날 밤에도 오빠는 나를 팔에 안고서 눈물을 닦아 주었어요. 여섯살 때였어요. 울지 말라고, 플로씨는 털갈이를 할 동안만 잠시 나갔다 올 거라고, 내일 아침이면 언제나처럼 침대 발치에 플로씨가 있을 거라고 했어요. 난 오빠 말을 믿고 울음을 그쳤어요. 내 아기고양이가 돌아오는 꿈을 꾸며 잤어요.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까, 아주 멋지게 하얀 털코트로 갈아입은 플로씨가 침대 발치에 있었어요. 오빠 말대로요.
며칠 뒤에 엄마가 말해줬어요. 오빠는 새벽 4시에 애완동물 가게에 가서 주인을 깨웠대요. 당연히 주인은 마구 화를 냈고, 게리오빠는 주인에게 당장 하얀 고양이 한 마리를 팔든지 아니면 목이 부러지든지 택일하라고 그랬대요."

"어떤 사람의 기억이란 항상 그처럼 사소하고 소박한 일로 인상이 남기 마련이지. 너를 위해서 사람들이 해 주었던 조그마한 일들. 아가씨도 마찬가지야. 아가씨도 오빠나 부모님들께 조그맣지만 마음이 담긴 일들을 해 주었어. 스스로는 다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들은 결코 잊지 못할 거야."

"그러길 바래요. 저를 그렇게 기억해 주기를 바래요."

"그럴 거야."

"나는......"

소녀는 울음을 삼키려고 목에 힘을 주었다.

"나는...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걸 다른 사람들이 몰랐으면 좋겠어요. 난 우주에서 죽은 사람들의 모습이 어떤지 알아요. 책에서 읽었어요. 내장이 모두 파열되어 터져 나가고 입으로는 폐가 튀어나오고 몇 초 뒤에는 완전히 형체도 없게, 끔찍하고 추한 모습이 되어 버려요. 난 그렇게 끔찍한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아요."

"아가씨는 부모님의 딸이고 또 오빠의 누이동생이야. 모두들 아가씨가 원하는 바와 다른 모습으로는 결코 기억하지 않을 거야. 모두들 아가씨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의 모습으로 기억할 거야."

"난 아직도 무서워요."

소녀가 말했다.

"어쩔 수 없어요. 하지만 오빠에겐 이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요. 만일 오빠가 제 시간에 돌아오면 난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말할 거예요. 그리고......"

통신기의 신호음이 날카롭고 단호하게 소녀의 말을 막았다.

"게리오빠!"

소녀가 벌떡 일어섰다.

"오빠에요!"

그는 급하게 소리를 키우면서 물었다.

"게리 크로스요?"

"그렇습니다."

소녀 오빠는 작지만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나쁜 소식이라뇨?"

소녀는 그의 뒤에 바짝 다가서서 통신기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소녀의 작고 찬 손이 그의 어깨 위에 얹혀졌다.

"오빠야?"

애써 가라앉힌 소녀의 목소리에는 그러나 가느다란 울림이 떨고 있었다.

"오빠가 보고 싶었어."

"마릴린!"

소녀의 이름을 부르는 오빠의 목소리는 놀라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긴급연락선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오빠가 보고 싶었어."

소녀가 잠시 끊었다가 다시 말했다.

"오빠가 보고 싶어서 여기에 숨어들었어."

"숨어들었다고?"

"난 밀항자야.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는 정말 몰랐어."

"오, 맙소사. 마릴린!"

그 목소리는 이미 영원히 그로부터 떠나간 누군가를 덧없이 절망적으로 부르는 외침이었다.

"무슨 일을 한 거니?"

"난... 아니......"

소녀는 더 이상 억제하지 못했다. 차갑고 작은 손이 그의 어깨를 격렬하게 움켜쥐었다.

"오빠, 그러지 마. 난 오빠가 보고 싶었을 뿐이야. 오빠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제발 그러지 마."

그의 손목 위에 따뜻하고 축축한 액체가 방울방울 떨어졌다.

그는 가만히 의자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그리고 소녀를 자리에 앉힌 뒤 마이크를 입 앞에 대 주었다.

"슬퍼하지 마... 오빠가 슬퍼하는 모습을 생각하면서 떠나고 싶지 않아."

소녀는 북받치는 울음을 참으려고 애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울지 마. 마릴린. 울지 마."

게리의 목소리는 갑자기 모든 고통을 삭인 듯 차분히 가라앉아서 따뜻하고 온화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울지 마, 울지 말아야 해, 마릴린. 모두 괜찮아. 다 괜찮다구."

"난......"

소녀의 아랫입술이 떨렸다. 소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난 오빠가 슬퍼하지 않았음 좋겠어. 곧 떠나야 하기 때문에 그냥 안녕이란 인사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야."

"그래, 그래야지. 그런 뜻은 아니었어."

게리는 갑자기 빠르고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긴급연락선, 스타더스트호에는 연락했소? 컴퓨터로 항로를 알아보았습니까?"

"약 1시간 전에 스타더스트호에 연락했소. 돌아올 수도 없고, 40광년 이내엔 다른 정기선도 없소. 그리고 연료도 부족하오."

"컴퓨터의 자료는 정확한 겁니까?"

"그렇소. 내가 이대로 그냥 가만히 있었겠소?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보았소. 지금이라도 방법이 있다면 나는 절대로 주저하지 않았을 거요."

"아저씬 나를 도우려고 애썼어요, 오빠."

소녀의 아랫입술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짧은 블라우스 소매가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아무도 도울 수 없어요. 더 이상은 울지 않겠어. 오빠와 아빠, 엄마 모두 잘 지낼 거지, 그렇지?"

"그래, 우린 잘 지낼 거야."

게리의 말소리가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소리를 최대로 올렸다.

"오빠가 점점 통신범위 밖으로 나가고 있어."

그가 말했다.

"1분 안에 끊어질 거야."

"오빠, 오빠가 멀어지고 있어."

소녀가 말했다.

"오빠가 통신범위 밖으로 나가고 있어.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다 할 수가 없어. 곧 안녕이라고 해야만 돼. 하지만 난 다시 오빠를 볼 수 있을 거야. 난 머리를 땋아 늘인 채로 오빠의 꿈 속에 나타날 거야. 죽은 새끼고양이를 안고 울기도 할거구. 아마 난 소근거리는 미풍처럼 지나가면서 오빠를 만질 수도 있을 거야. 어쩌면 오빠가 얘기해 준 황금 날개를 가진 종달새가 될지도 몰라. 그래서 오빠가 보고 싶어 바보같이 서둘렀던 나의 어리석음을 노래할 거야. 오빠는 나를 볼 수 없더라도 내가 항상 곁에 있다는 것을 알겠지? 게리오빠, 그렇게만 생각해. 항상 그렇게. 다른 식으론 말고."

우덴의 자전때문에 게리의 목소리는 갈수록 희미해졌다. 꺼질듯이 조그맣게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항상 그렇게, 마릴린... 항상 그렇게. 절대 다른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을께."

"시간이 됐어, 오빠. 이제 가야만 해. 안......"

소녀의 말은 중간에 끊어졌다. 입술이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소녀는 손으로 입을 꽉 눌러 막았다. 잠시 뒤 다시 말을 시작했을 때는 또렷하고 맑은 목소리였다.

"안녕, 오빠."

형언할 길 없이 뼈에 사무치는 마지막 말이 차가운 금속 통신기를 따라 가녀리게 흘러나왔다.

"안녕, 마릴린... 안녕, 내 귀여운 동생."

소녀는 고요함 속에서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마치 말소리가 사그라져 가면서 남는 메아리의 흔적을 들으려는 듯이. 그리고 나서 소녀는 조종석에서 일어나 에어록으로 걸어갔다. 그는 입구 옆에 있는 검은 색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에어록의 문은 마치 소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감옥처럼 가볍게 미끄러지며 열렸다. 소녀는 망설이지 않고 머리를 똑바로 든 채 걸어 들어갔다.

갈색 곱슬머리가 소녀의 어깨에서 찰랑거렸다. 하얀 샌들을 신은 두 발은 연락선 안의 미약한 중력에도 아랑곳없이 확고하게,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계기판의 파랗고 빨간 전등빛들이 샌들의 장식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그는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소녀는 결코 도움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에어록 안에 완전히 들어선 소녀는 그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목에 나타나는 격동만이 소녀의 심장이 강하게 고동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줄 뿐이었다.

"준비됐어요."

소녀가 말했다.

그는 손잡이를 밀어 올렸다. 두 사람 사이에 순식간에 벽을 만들며 문이 닫혔다. 소녀의 생에서 가장 마지막 순간은 칠흑같이 검고 어둠침침한 공간 안에 갇혀 버렸다. 문이 잠기는 딸깍 소리가 났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단호하게 빨간 손잡이를 끌어당겼다. 공기가 에어록에서 쏟아져 나가면서 연락선 선체가 가볍게 떨었다. 마치 무엇인가가 지나가다가 부딪힌 듯, 에어록 쪽의 선체 벽에서 울림 소리가 났다. 그리고는 곧 고요해졌다. 긴급연락선은 우덴의 대기권으로 계속 하강하고 있었다. 그는 붉은 손잡이를 잡아당겨 텅 비어 버린 에어록의 문을 닫았다. 그 다음 늙고 병든 사람처럼 느릿느릿 걸음을 옮겨 조종석으로 돌아와 앉았다.

그는 조종석에 기대어 앉아 통신기의 단추를 눌렀다. 응답은 없었다. 물론 그는 응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소녀의 오빠가 제 1기지를 통해 연락하려면 밤이 지나야 한다.

아직 감속을 시작할 시간은 아니다. 그를 태운 긴급연락선은 아직도 하강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기다렸다. 로켓추진기가 부드럽게 진동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기다렸다. 로켓추진기가 부드럽게 진동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생체감지기의 바늘이 0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1만큼의 연료에 1만큼의 질량. 냉혹한 방정식의 균형은 이제 이루어진 것이다. 긴급 연락선에는 그 혼자뿐이다. 바깥 공간에서 형체도 없는 추한 모습의 무엇인가가 연락선을 앞질러서 바삐 내려가고 있다. 소녀의 오빠가 뜬눈으로 밤을 새울 우덴으로 가고 있다. 그러나 텅 빈 긴급연락선 안에는 아직도 소녀의 존재가 머무르고 있는 것 같다. 냉혹한 방정식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던 소녀가 아직도 있는 것 같다. 금속상자 위에 앉아 있는, 놀라고 당황하는 소녀의 모습이 아직도 보이는 것 같다. 소녀가 떠난 공허한 공간에는 소녀가 남긴 말만이 끊임없이 분명하게 메아리치고 있었다.

... 나는 죽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어요. 난 안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