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Channel 12호] 골드와 화폐와 플라토 (3)

Day 1,559, 06:30 Published in South Korea Greece by SionStravinsky

골드와 화폐와 플라토(3)

총력전도 있었고 전 시험이 있었고 그 외에도 이래저래 일 많은 일요일 저녁이네요.
써야지 써야지 하다가 드디어! 3부작 완결이 났습니다!
부디 묻히지만 말았으면(...)


1편과 2편에서는 Erepublik의 간략한 경제구조와 금융시장, 그리고 통화량에 대해 주절거렸습니다.
그리고 두 편에 걸친 떡밥투척은 전부 3편을 위해서입니다.
이번 편은 여러분이 시장을 보는 눈을 완전히 바꿔 놓을 것입니다(정말!?).

[중급자용] 통화량과 물가

지나야 할 길이 많으므로 요점만 짚으면서 빠르게 가볼까요?



통화량의 증가는 곧 물가와 임금의 상승으로 이어집니다.



통화량의 감소는 물가와 임금의 하락으로 이어집니다.

증명은 생략하고 직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통화량이 증가한다는 이야기는 세상에 화폐가 많이 풀렸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화폐가 흔해지고 화폐의 가치는 떨어집니다.
같은 물건을 사는데 더 많은 화폐를 내놓아야 하는 것이지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이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갚기 위해 마르크를 찍어냈더니 물가가 엄청나게 올랐다는 이야기가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돈이 풀리면 물가가 오르는 것입니다.
가까이는 우리나라도 이런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단기간에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경제규모에 맞춰 통화량이 폭증했고, 물가 역시 빠른 속도로 오르고 있습니다.

한편 통화량이 감소한다는 것은 세상에 돌아다니는 화폐가 줄어든다는 뜻이고, 귀해진 만큼 화폐는 더 높은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극단적으로 여러분이 마왕을 무찌르려고 전설의 검을 사야 하는데 이 세상에 돈이라고는 전설의 동전 하나밖에 없다면, 전설의 동전 한 닢으로 전설의 검을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실 물가에 영향을 주는 요인들에 대한 좀 더 세련되고 어려운 설명이 있으나 괜시리 글만 길어지므로 이리퍼 세상에서는 ‘통화량과 물가는 비례한다’ 정도만 기억하시면 되겠습니다.





이쯤해서 기억 속에 있던 패치 직후의 세상을 떠올려주시기 바랍니다.
한없이 떨어지는 원자재 값, 함께 깎여나가는 임금, 악성재고, 치솟는 금값…….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이 대공황은 봇의 실종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고급자용] 그리고 봇 말고 아무도 없었다.

눈치 채셨습니까, 여러분?
봇은 통화량을 조정하고, 통화량은 물가와 임금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봇을 조종하는 것은 플라토입니다.


플라토의 손에는 전 세계의 어떤 국가의 지역화폐량도 마음대로 늘리고 줄일 수 있는 무시무시한 힘이 쥐어져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화폐를 발행할 권리가 엄격하게 통제되기 때문에 통화량은 전적으로 중앙은행의 정책에 의해 움직이게 되고, 또 중앙은행은 자신이 발행한 화폐량을 알고 있기에 그에 맞춰 정책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Erepublik에서는 아닙니다.

봇이 각국의 중앙은행,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은행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오직 봇만이 말입니다.

전 세계에 하나 밖에 없는 은행.
말하자면 세계 단일 은행입니다.

제가 관찰한 결과 이번 경제공황의 전적이고 유일한 원인은 봇이 잠시 작동을 멈춘 며칠 사이에 전 세계적으로 통화량이 급속도로 감소했다는 것, 그것뿐입니다.

저는 이 경제위기가 패치로 인해 생긴 한순간의 불행한 사고일 뿐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면 어떨까요?

만약 누군가(어쩌면 플라토가) 의도적으로 봇을 이용해 Erepublik 경제 시스템에 충격을 주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Erepublik 세상의 경제시스템은 전투와 대단히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빵과 탱크를 살 수 없다면 아무리 강력한 유저라도 (현질 없이)제한적인 영향력만 발휘할 수 있을 뿐입니다.
외부 경제에 아랑곳하지 않고(현질 없이) 자신의 빵과 탱크를 자급자족할 수 있는 유저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 사실은 무엇을 뜻할까요?



ONE, TERRA, EPIC, EDEN...
세계를 분할하는 힘의 균형이 깨졌을 때, 플라토는 무리해서 온갖 욕을 먹어가며 전투 자체를 손질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봇을 잠시 꺼버리는 것만으로도 과열된 전장은 충성도 높은 현질러들만 남고 곧장 소강상태로 접어들 것입니다.
봇은 단순히 지역화폐를 공급하기 위한 스크립트 덩어리가 아닙니다. 세계 경제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율해가는 스카이넷입니다. 그림자 정부입니다. 프리메이슨입니다. 신세계 질서입니다.

물론 아직까지 봇을 악용하거나 특정 국가에 유리하게 적용하는 사례는 제가 알기로는 아직 없었습니다.(제가 늅늅이라서 모르는 걸지도 모릅니다. 혹시 아시면 제보 부탁!)
또한 플라토 역시 반복되는 경제적 불안이 유저층을 얇게 만들고 게임의 수명을 단축시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봇이 지역화폐를 공급하기만 한다면, 어째서 상점이나 NPC 시스템을 쓰지 않는 것일까요? 저는 이런 의문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애초에 Erepublik의 경제 시스템은 자체적으로 지역화폐를 생산할 수 없는 불안한 구조입니다. 플라토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렇다면 NPC나 상점을 통해 유저로부터 재화를 직접, 즉시 매입한다는 간단한 해결책을 놔두고 왜 무리해서 봇을 활용하는 것일까요?

왜 특정 시간에만 봇을 이용해 통화를 공급할까요?

정확히 말하면, 봇은 왜 하루에 특정 횟수만 물건을 매입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하는 편이 통화량을 쉽게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째서 게임의 큰 틀이 변하지 않은 이번 패치에서 봇이 문제를 일으켰을까요?

어쩌면 플라토는 ‘실험’을 한 것은 아닐까요?


[고급자용]젤나가 뺨치는 실험

제3편의 초입부에 저는 통화량이 감소하면 물가가 떨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금값은 어째서 올랐을까요?

만약 세계적으로 금이 줄어들었다면, 금의 통화량이 감소한 것이므로 금값이 오른 것은 설명이 됩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공급 부족에 빠진 것은 지역화폐였지, 금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지역화폐가 부족해지면 지역화폐가 귀해지고, 그럼 같은 지역화폐를 가지고 더 많은 금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금을 재화로 보고 접근했을 때, 위와 같이 논리에 허점이 생기는 부분을 발견하면서 저는 이 시리즈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금은 빵과 탱크처럼 재화의 종류가 아니라 지역화폐를 압도하는 강력한 기축통화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금을 화폐로 보고 접근한다면, 그리고 금의 공급에는 문제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최근의 금값 상승은 금의 수요 증가에서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금의 수요는 왜 증가했을까요?

바로 금이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대규모 패치를 앞두고 많은 올드비들이 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자산을 분산시켜라”
즉, 다음 패치에서 어떤 변화가 생길지 모르니 빈 땅만 줄줄이 사거나 돈만 잔뜩 들고 있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결국 그 걱정은 맞았습니다.
사실 자산을 분산시키라고는 했으나, 상당수의 유저들은 자산을 금으로 바꾼 상태로 패치날을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플라토가 현질러에게 불리한 패치를 할 리가 없기 때문이지요.



금은 우리가 모르는 많은 안전장치를 갖고 있습니다. 원자재 공장을 한번 볼까요? 전 이 메뉴를 볼 때마다 플라토가 고민을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게임을 막론하고 ‘가장 좋은(여기서는 Q5)’ 아이템은 가격대 성능비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냥 성능이 좋을 뿐이지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게임을 오래 즐겨온 부유하고 강한 유저들을 겨냥한 것이니까요.
반면에 Q3 원자재 공장을 10골드로 책정한 플라토의 재치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1KRW = 0.001Gold의 환율시장이 지역화폐의 가치 붕괴를 막기 위한 저지선이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만, 위의 공장 메뉴 구성은 다시 말해 무슨 일이 있더라도 1Gold = 300KRW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는 보증수표입니다.
왜냐하면 금값이 300KRW까지 내려간다면 모두 금을 사서 Q2 대신 Q3 원자재 공장을 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플라토는 지역화폐의 가치를 0.001Gold로 유지함으로서 현질로 얻은 금이 지나치게 많은 지역화폐로 환전되는 것을 방지하면서(근데 현질 자체는 상한이 없습니다. 플라토를 욕하세요!) 동시에 금값을 300KRW 이상으로 방어하기 위한 안전선을 쳐 두었습니다. 장사를 아는 운영자죠.

따라서 많은 패치를 겪어온 올드비들과 플라토의 흑심을 잘 아는 상당수의 유저들이 최대한 많은 금을 확보한 상태로 패치를 맞이합니다. 부동산 불패 신화처럼 골드 불패 신화가 생긴 것입니다.
문제는 패치 이후 세계경제가 얼어붙으면서 금융시장이 얼어붙어버렸고, 금의 총량은 큰 변화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뒤늦게 금의 수요는 폭증하게 됩니다. 패치 이전에는 안전자산인 금을 매입하는 유저가 늘어났고, 패치 이후 시장 기능이 마비되면서 현금동원력이 큰 유저들이 급히 공장 건설에 뛰어들면서 금을 매입했기 때문입니다. 봇이 작동을 하지 않으면서 그나마 시장이 살아있고 급하면 자신이 쓸 수도 있는 완제품 공장으로 많은 자금이 모이게 된 것입니다. 서부 개척시대처럼 골드 러시가 이어지면서 저를 포함한 많은 늅늅들이 영문도 모르고 치솟는 금값을 올려다 볼 뿐이었습니다.

정확히 몇 개 국가에서 금값이 얼마나 폭등했는지는 체크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국토가 없는 eSK에 한해서는 고용이 불가능해 환율 충격이 훨씬 클 수밖에 없습니다. 원자재를 소비할 공장이 개인별로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이 일어나면 반드시 현질에 대한 유혹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당장 같은 금을 질러서 환전했을 때 예전보다 훨씬 많은 원자재 공장을 지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플라토!!!)

다행히 며칠 뒤 봇이 시장에 되돌아오면서 이번 경제위기는 안정 국면으로 접어들게 됩니다.



이것은 정말 사고였던 것일까요?

어쩌면 플라토는, 이 모든 사태를 예견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금값이 폭등하기를 기다려 현질 장사를 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요?

이번 경제공황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골드와 화폐와 플라토의 미묘한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플라토가 느낄 유혹에 대해서 우리는 앞으로 대비해나가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eSK만의 문제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경제 시스템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와, 그 의미를 아는 것은 세계적 사건 속에서 eSK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골드와 화폐와 플라토 3부작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외부 충격에 대비한 실물경제 방어구상과 통합경제 방어구상, 그리고 유사시 적국에 대한 경제 테러의 가능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