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 전쟁으로 배우는 역사, 청나라의 아편전쟁

Day 2,521, 03:55 Published in South Korea Republic of China (Taiwan) by IGROMIR


[미션 기사] 역사 속의 중국, 청나라와 열강의 아편 전쟁
+ 아편 전쟁 : 영국 vs 청나라
+ 이리퍼블릭 : 아메리카, 아시아 국가의 중국 침략기


이익을 목적으로 상인들이 오고 그들은 이익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도리로 다시 독물을 사용해 중국 국민을 해치는 것입니까?
질문을 허락한다면 묻겠습니다.
당신의 양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 임칙서가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


아편전쟁이라 함은 1840∼42년 아편 문제를 둘러싼 청국(淸國)과 영국간의 전쟁을 말한다. 청국은 쇄국정책을 시행하여 외국 무역은 광저우항[廣州港]에 한하며, 또한 공행(公行)이라 불리는 상인단체(길드)를 통해서만 허가하였다. 18세기 후반 이후 외국 여러 나라 중에서 영국이 광저우 무역의 중심이었다. 중국으로부터의 수출은 비단 ·차 ·도자기 등이었고, 영국은 약간의 모직물 ·향료 정도이며 그 밖에는 대량의 은(銀)으로써 비단과 차를 구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18세기 말 영국 정부가 차의 수입세를 인하하고부터 일반 국민 사이에 차를 마시는 풍습이 보급되어 중국차(홍차)의 수입이 격증하였다.

그리하여 1832년까지 중국무역의 독점권을 갖고 있던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산(産)의 목화와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함으로써 차의 구매자금을 조달하려고 했다. 특히, 그들이 전매제도 아래에서 중국인의 기호에 맞도록 정제하여 모험적인 민간상인에게 팔아넘김으로써 중국에 밀수된 아편의 양은 해마다 격증하였다.

1830년대가 되자 종전까지의 입초(入超)에서 중국측의 은(銀)이 출초(出超)로 바뀌게 되어, 중국의 은가(銀價)가 등귀(騰貴)하기 시작하였다. 본위(本位)화폐인 은화의 등귀는 재정과 상업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일상 동전을 사용하면서, 이것을 은으로 환산하여 납세하지 않으면 안 되는 농민에게 있어 동전에 대한 은가 비율의 고등(高騰)은 심각한 것이었다. 또한 관청, 특히 군대 안의 아편 중독환자의 격증은 전제왕조(專制王朝)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이와 같은 급박한 상황에 몰리자 황제(道光帝)는 유명무실하게 된 아편금지령을 엄격히 실행하기 위하여, 강경한 아편금지론자로 알려진 임칙서(林則徐)를 흠차(欽差:全權)대신으로서 광저우에 파견하여 밀수를 근절하고자 하였다.

임칙서가 무력의 위협을 포함한 강경수단으로써 영국상인으로부터 아편을 몰수한 것이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영국상인들은 서약서의 제출을 거부한 채 마카오로 철수했고, 영국 정부는 10월 원정군 파견을 결정했다. 한편 주룽[九龍]에서 술에 취한 영국인 선원들에게 중국 농부 임유희(林維喜)가 살해된 사건(1839. 7. 7)은 전쟁 발발의 또다른 계기가 되었다. 무역 감독관 찰스 엘리엇이 임칙서가 요구한 범인의 인도를 거부하자 8월 16일 임칙서가 마카오를 무력으로 봉쇄했으며, 57가구의 영국인은 포르투갈의 압력으로 홍콩과 주룽 사이의 바다로 이주했다. 9월 4일 압박 해제를 요구하러 주룽에 갔던 엘리엇의 함대와 중국 해군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첫 발포가 일어났다. 이어 11월 3일 촨비[川鼻]에서 양국 해군간에 전투가 벌어졌고 중국이 참패했다. 이로써 선전포고 없이 전쟁이 시작되었다. 12월 6일 임칙서는 영국과의 통상 정지를 선포했다.

영국정부가 내외의 격렬한 비난을 무릅쓰고 굳이 아편문제로 개전(開戰)하게 된 이유의 하나는 아편의 전매수입이 인도재정 안정에 큰 비중을 차지하였듯이 아편무역이 영국의 당시의 인도 지배에 빼놓을 수 없는 지위를 차지하였던 것, 한걸음 더 나아가 아편에 의하여 중국으로부터 얻어진 은이 영국을 중심으로 미국 ·호주 ·중국 ·인도를 연결하여 시행된 세계 무역의 밸런스를 결제하는 수단으로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 것 등이다. 즉, 아편무역 자체를 수호하고 합법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서 1825년의 첫번째 공황(恐慌) 이래로 절실히 요구된 중국시장의 개방, 즉 연안 제항(諸港)의 개항과 무역에 대한 중국측의 여러 제한의 철폐, 유리한 무역 제(諸)조건과 무역상 ·군사상의 근거지 획득 등의 요구를 일괄하여 실현할 것을 목표로 했다.

[ 1. 아편전쟁의 경과 ]
1840년 여름 함선 48척과 병력 4,000으로 구성된 영국 함대가 북상하여 베이징에 이르는 통로에 있는 다구[大沽] ·톈진[天津]을 위협하자, 청조는 일단 휴전을 명하고 철저한 항전파인 임칙서를 전쟁 도발자로 몰아 면직시키고, 강화 교섭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화평(和平)을 위한 초안이 쌍방에게 불만이어서 전쟁이 재개되었다. 다음해 증원부대 1만을 추가한 영국군은 양쯔강으로 침입하여 난징[南京]에 육박하였다. 청조는 민중을 무장하여 장기에 걸치는 게릴라전을 수행할 입장이 못 되었다. 무장한 민중이 이민족(異民族) 지배자인 청조를 위협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더욱이 정규군의 군규(軍規)는 부패할 대로 부패해 있었고, 일부를 제하고는 저항다운 저항도 없이 연전연패를 거듭하였다.

전쟁의 전(全)기간을 통하여 영국군의 사상자(死傷者)가 520명인 데 대하여, 청조의 사상자는 약 2만에 이르렀다. 청조는 난징의 함락이 가져올 황제의 권위 실추를 방지하고자, 그 직전에 영국의 요구를 전부 수락하고 난징 조약[南京條約]을 체결하였다(1842.😎. 그러나 그 동안 광저우 교외의 삼원리(三元里)에서 영국군의 폭행에 격분한 농민 수만이 무기를 가지고 영국군을 포위하는 등, 민중이 자발적으로 침략 반대투쟁에 봉기하는 움직임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특히 광둥[廣東]에서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영국인의 입성을 거부하려는 배외투쟁이 계속되었다.

[ 2. 아편전쟁의 후 폭풍 ]
난징 조약과 그 추가조약(虎門條約), 오구(五口:廣州 ·厦門 ·福州 ·寧波 ·上海) 통상의 결정 등으로 중국은 영토의 일부뿐만 아니라, 세제 ·사법상의 주권의 일부마저 제한되었다. 프랑스 ·미국도 영국에 따라 각각 황푸[黃浦] ·왕샤[望廈]조약이라는 불평등조약을 맺었다(1844). 이들 제(諸)조약은 중국을 강제적으로 세계 시장에 끌어들임과 동시에, 영사재판권과 최혜국(最惠國)대우를 인정시키고 관세자주권을 빼앗아, 중국을 반(半)식민지화하는 근본을 만들었다. 이에 중국은 전후의 막대한 배상금의 지불(2,100만달러), 아편 거래에 의한 은의 유출, 점차로 국내 산업을 압박해오는 외국 공업제품의 보급, 행정기관의 퇴폐 등으로 봉건사회의 근저가 흔들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