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기사 3/ (스압주의)정유재란과 울산성 전투 /+빵
Molang
미션기사를 진행중인 seoul city입니다.
사실 연합군 최악의 삽질 공수 작전인 마켓가든 작전을 주제로 하려다가;;
우리 역사에서 알려져 있지 않은 울산성 전투를 주제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를 다루기 위해서는 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울산성 전투도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임진왜란(조일전쟁)에 대해,,
1592년에 일본군이 부산을 따고 신립이 탄금대에서 학살에 가까운 대패를 당하고
보름만에 수도가 날라가고, 국왕은 의주까지 도망가지만 의병들이 일어나서 일본군을 상대하고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왜놈들을 때려잡으시면서 나라를 구하고 장렬히 전사하셨다.
대충 이렇게 알고 계실겁니다. (+명나라 참전, 권율,김시민)
그런데 임진왜란은 단순히 저렇게 이해하기에는 매우 특이한 전개를 보이는 전쟁입니다.
대부분의 유명한 전투들은 1592년에서 1593년, 고작 '1년'사이에 벌어졌습니다.
임진왜란하고 검색해 보면 분명히 1592~1598로 나오는데 말이죠,(?????????????????)
1593년 초 조명 연합군은 수도 서울을 회복하지만, 이는 일본군의 전략적 퇴각 때문이었지
연합군이 잘싸워서 그런건 아닙니다;;, 오히려 명군은 서울 인근 벽제관에서
일본군에게 강펀치를 한대 맞고,, 일본군과 전투를 회피합니다.
그리고 나서 명나라와 일본은 조선을
일본의 제안은 전라도,경상도 할양, 명나라 공주를 시집보내셈, 도요토미를 황제로 인정이런 내용이었죠;;;;;
일본 협상대표였던 고니시는 전쟁 보다는 명나라와 쇼부를 쳐서 더 많은 이익을 얻고자 했습니다,
명나라 대표였던 심유경은 명나라 조정에 황제로 인정 해달라는 부분에 대해서
'왜왕으로 책봉해 달라' 라고
명나라는 조선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황제로 인정해달라고 하는 요구에 대해 분노하게 되고 협상 판을 엎어 버립니다.
이렇게 해서 1597년, 일본의 전면적 재침략, 정유재란이 시작됩니다.
(5년 가까이 회담을 했기 때문에 전면적인 전투가 없었던 셈이죠,,)
그러나 육상에서는 조명연합군이 일본군을 전라도 일부, 경상도로 밀어냈고,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님이 '명량'을 시전합니다.
그후 조명 연합군이 목표로 삼은 곳은 가토 기요마사가 지키던 울산성이었습니다.
1. 울산성 전역
울산성 전투는 우리가 성에 대해 공격을 하는 아주 보기 드문 전투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항상 수비만 하고 있었거든요,,
아무튼 1598년 1월, 5만에 가까운 조명 연합군은 가토 기요마사가 지키는 울산성을 공격합니다.
위 사진은 일본 구마모토 성입니다.
일본의 왜성은 위 사진과 같이 매우 복잡한 구조로 지어져 있습니다.
대포로 포격해서 끝날 그런 성격의 성이 아닌 셈이죠,
일본의 구원군을 격파 했음에도
조명연합군은 전면적인 공격이 아닌 성안의 일본군이 굶어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성 안의 일본군은 식수가 부족해서 생쌀과 말고기로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추운 겨울이었고, 공격 하는 조명연합군도 피해가 막대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게다가 추가적인 일본의 대규모 구원군이 나타나자 조명연합군은 퇴각을 결정합니다.
++++++++
위의 구마모토 성은 울산성에서 할복 직전까지 갔던 가토 기요마사가 지은 성입니다.
물과 식량때문에 고생했던 가토는 엄청난 수의 우물을 팝니다.
심지어 다다미 조차 식량으로 쓰기위해 고구마 줄기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래저래 생략했는데도 이렇게 스압이 될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제가 이해력이 딸린지 모르겠습니다만,, 울산 왜성 사진 첨부 하겠습니다.
사진 출처 :
http://blog.daum.net/bjg1027/540
내용 참조 : http://ko.wikipedia.org/wiki/%EC%9A%B8%EC%82%B0%EC%84%B1_%EC%A0%84%ED%88%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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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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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
잘읽었습니다~.
수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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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전사 감사합니다.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실제로 저 울산성을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기간은 얼마동안이었으며, 가토 본인은 조선 북부로 진격하지 않고 울산성에 눌러앉았을까요?
이 질문의 의도는, 당시 왜군이 우리가 아는 왜성과 최소 같은 수준의 성을 임진왜란-정유재란 기간 사이에 축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지를 가늠해보고 싶다는 겁니다. 심지어 임진왜란때 조선 백성들은, 대부분 일본군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피난을 갔을테고 일부 피난가지 않고 남은 백성들도 일본군 눈에 띄는 경우 일부가 포로로 일본에 끌려가지만(도자기장인 등 일본에 특수한 도움이 될 경우) 나머지는 대개 무참히 살해당했다고 하는데, 제대로 된 성을 쌓을만한 인력이 있었을까 싶습니다.
결정적으로 이미 어느정도 피해를 입긴 했겠지만 조선의 성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이걸 허물고 왜성을 짓는다는것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으니, 결론은 왜성에 대한 공성전이라기보다 조선의 양식으로 지어진 성에 대한 공성전이라고 보는게 더 옳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점령 기간에 대해서는 1592년 4월에 경상도가 넘어간 이후 전쟁이 끝날때 까지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의병들의 유격전이 존재 했지만 게릴라 활동과 정규군에 의한 주요지역 점령은 엄연히 차이가 있습니다.
울산에는 서생포 왜성 이라고 해서 왜성 양식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성을 짓는건 백성들만 동원되는게 아니죠,
10만 가까운 일본군도 놀고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죠. 하지만 조선에 남아있는 왜성 유적들을 보시면 일본에 있는 것과 구조가 꽤나 틀린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비슷한건 디자인? 건축양식? 그런 것 뿐이겠지요. 그리고 관가 주변의 지역은 점령당했지만 주변의 필드를 일본군이 쓸고 다닐정도로 병사가 남아돌았냐면 그렇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으로 예시를 들어보자면 이슬람국가의 점령지역도를 보면 편한데요. 걔네가 주장하는 영토는 꽤나 넓지만 실제 그 땅들 중 면적으로 치면 주요도시가 있는 일부만 그렇게 관리될 뿐 도시 외곽지역은 관리가 안 되거든요.
또한 일본군이 여기저기서 조선 양민들을 죽였습니다만;;
의외로 일본군 점령지에서 조선 양민들의 생활은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전쟁 초반 일본군은 신속한 거점 점령 및 조선 국왕 생포가 목적이었습니다.
때문에 저항 의지 말살과 군인에 대한 약탈을 허용하면서 양민들을 죽이는건 당연한 일 입니다. (뉘앙스가 좀 이상하네요😉
그러나 후반에 들어서면서 영토 할양 문제와 장기 주둔으로 양상이 바뀌면서
백성들을 수탈의 대상이 아닌, 먹고 살게 해주는 방식으로 전환합니다. 게릴라 활동 억제도 있지만 물물교환이라든지, 여튼 간에 이들이 저항만 하지 않는다면 일본군에게도 전혀 나쁘지 않은 일이죠
그것도 제가 첫 댓글에서 얘기한 내용이네요
기본적으로 조선 백성들을 잡는데 군사적 역량을 쓰는게
일본 입장에서도 전혀 이득이 안 되기 때문에
조선 백성들의 소극적인 피난이나, 집에 꽁하니 숨어있는걸 일본군은 굳이 군사를 퍼트려서 끌고오려고 하기보다는 그냥 방치하는 쪽을 택했을 겁니다. 즉 그 백성들은 일본군 입장에서 아무 의미 없는 대상. 피난이라고 해서 민족대이동 수준의 피난이 이뤄졌을 가능성은 낮고 집 안에 숨어있거나 일본군의 기척이 보이면 가까운 산에 며칠 들어가있거나 하는 식이었을겁니다.
지금 말씀 하시는 대전제가
조선 백성들이 숨어있었다. 일본군을 피해 피난을 갔다 라는 것인데
이게 틀린말은 아니지만, 꼭 그렇지 않았다는게 요지입니다.
오히려 일본군은 회유와 지역 안정 목적으로 민생 안정쪽으로 전략을 전환합니다. 때문에 양민들이 의외로 생활이 좋았다라고 표현을 한것이고요
아예 걸리면 다 죽여버리겠다고 학살정책으로 가지는 않은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많은 무고한 조선 백성들이 죽임당한 후 흔히 귀.. 아니 사실은 코를 베여갔다고 하지요.
임진왜란 전후 백성의 숫자 통계를 시간나면 한번 확인해보셔요.
제가 아는것과는 정반대의 주장을 펼치시는군요. 그것도 정확한 근거가 있는것도 아닌 추측성으로요. 그런식의 주장은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한 사료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수군통제사 원균이 점령지에서 나무를 베던 왜군을 습격했다가 도리어 역으로 털린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몇가지를 시사하는데요. 첫째는 정유재란 이전에 조선의 땅에 일본군의 점령지가 있었고 그 중에는 비전투지역도 있었다는 점, 두번째는 왜군의 점령에 대해 조선정부가 인지하고 있었고 인정하고 있었다는 점, 이것을 토대로 왜군이 조선의 성을 점령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편의에 맞게 개조할 수 있었다고 충분히 유추가 가능합니다. 성이라는 시설물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건 아니기에 완전히 새로 축조했다고 보기에는 조금 힘들겠지만 조선색을 지우고 왜색을 입히기에는 1592~1598년의 7년은 충분한 시간입니다.
정말 유익한 정보네요
이거 댓글의 댓글로 달자니 눈이 너무 아프네요;;
디자인과 건축양식이 비슷한것과 구조가 다르다는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안가네요.
그렇게 큰 차이가 있다면 학자들이 굳이 왜성 이라고 부르지는 않았겠지요.
그리고 경상도에서 의병 활동이 많았지만, 경상도 자체를 회복할수 있을 정도의 여력은 없었습니다.
일본군의 지역 장악력도 그리 떨어지는 편도 아니었고요.
주요 거점만 겨우 지켜낼 정도 였다면, 왜 조명 연합군이 '힘'으로 경상도를 회복하지 못했을까요?
글을 정확하게 읽어 주세요.
우리나라에서 쌓아놓은 성의 윤곽을 베이스로 보완할때 사용한 양식이 일본 스타일이니 왜성이라고 하는거지
그 윤곽을 정하는 과정 (미로를 만든다거나 etc) 에서는 일본색이 들어갈 기회가 없었을 거라는게 요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쌓아놓은 성의 윤곽을 베이스로 보완'
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성은 애초에 '우리나라에서 쌓아놓은 성이 아닙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대부분 '이었을 거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본인의 견해 혹은 추측이지 정확한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더불어 왜성에 일본색이 들어갈 기회가 없다고 하시는것
자체가 어폐입니다.
1593년 부터 1598년 까지 계속해서 일본군이 점령하면서 증축을 거듭했던 성에서 일본색이 없는게 더 이상한거죠,
제가 괜히 구마모토 성의 사진을 올려둔듯 하네요,
위에 울산성 사진 첨부해 두겠습니다.
저게 과연 일본색이 없는지는 알아서 판단하실 문제인듯 합니다.
그때그때 그들이 했을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가지고 논하는 거죠
어차피 지금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승자들이 만들어놓은 거고, E.H 카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명저에서 남겼던 얘기를 보면 결국 그들 입장에서 불리한 사료는 가능하면 지워버리고 남기고싶은 것만 남깁니다. 최근 지배자 계급이 고의적으로 남기고 퍼트린 일부의 자료들만을 '펙트'로 인정하면서 정확한 것만 가지고 오라는 패턴은 일베 애들이랑 정말 의미없는 소모성 말 싸움을 하면서 많이 봤어요.
정황의 흐름을 무시하고 조작된 사료만을 계속 원하실 거라면 이 얘기는 여기서 그만두는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얘기에서 문맥을 읽지 않고
"우리나라에서 쌓아놓은 성을 베이스로 일본색을 입혔다" 라는 주장을 "우리나라에서 쌓아놓은 성이니 니 말대로라면 일본색이 없겠지? 일본색이 있다면 내가 이겼다." 라고 해석하는 쇼펜하우어식 말싸움 승리법은 소모성 말싸움만을 낳을 뿐이지 제대로 도움이 될 만한 논의를 이끌어낼 수 없습니다.
이 이상의 오류를 게속 보기는 싫으니, 계속 문제가 될 법한 논조가 보인다면 제 쪽에서 얘기를 그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색을 입히고 말고 문제가 아니라
일본애들이 지은 성입니다. 일본인들이 지은성에 일본색이 없는게
더웃긴거 아닙니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그리고 댓글도 말싸움 하려고 단게 아닙니다만 혼자 열폭하지 마세요.
논조를 지적받은 다음 열폭드립이라니.. 말을 섞질 맙시다 이젠. 열폭의 말뜻은 열등감 폭발이라는건데, 이 상황이 누가 열등감을 가질만한 상황인지 모르겠네요;
이 이상 얘기해봤자 누가 손해일진 뻔하니 그만 하시는 쪽이 존중받으실수 있어요.
논조 지적 같은 소리 하지마세요. 이건 이렇게 길어질 글이 아닙니다.
정작 왜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못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일본인들이 처음 건설하고, 학자들이 왜성이라고 주장하는 성을
일본색이 들어갈 기회가 없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재미있게 잘읽었습니다~
v12
미션 끝나면 이제 이런 재미있는 기사 못보는건가요 ㅜㅜ
지금 미션때문이라 몰아서 쓰긴 하는데;; 기회가 된다면 더 써볼게요 ㅎㅎ
v14
v 미션 끝나고도 계속 재미있는 이야기 부탁드려용 ㅎㅎ v는 꼬박꼬박 누를께요
[removed]
v
울산왜성이 왜 왜성이 아닐까. 왜인들이 정유재란때 지은게 맞을텐데요...
가토가 울산읍성이랑 병영성이랑 허물어서 그 돌로 쌓았다고 하네요.
잘 보고 갑니다.
seoul city님 기사 잘보고갑니다! s52v19
울산왜성은 가토 주도로 지은 성이 맞습니다만, 하지만 그걸 가지고 "일본의 왜성은 위 사진과 같이 매우 복잡한 구조로 지어져 있습니다." 는 건 지나친 논리의 비약입니다. 저런 대규모 성은 일본 역사에서 대단히 드뭅니다.
그새 댓글이 더 달렸네요;;;;
본래 성곽, 성루나 저격 구멍과 같은 왜성 특유의 방어 구조를 말하려던 것이
덜렁 구마모토 성의 전경을 올려놓았네요;; 그점은 제가 잘못했네요,,
그런데 이 성은 일본역사에서 '대단히' 드물지 않습니다.
고작 에도시대 초기 다이묘 6위의 성이 대단히 드물다면 재미있는 것이죠.
그렇지요...제가 울산 병영출신에 지금 일본에 살고 있어서..
학성공원(울산왜성 유적터)에도 가봤고 일본내 여러 성에도 가봤습니다
울산왜성 규모는 절대 일본 전국시대나 에도시대의 일본성에 비해 큰 편이 아닙니다
아아 뒷문단은 구마모토 성에 관한 내용입니다.
제가 오해를 드렸네요.
왜놈들이 지은 성이니깐 왜성이라 불리는데...
그게 문제가 되나요? 참 희안하네
조선의 축성양식과 일본의 축성양식은 전혀 다릅니다
물론 일본의 축성양식은 축성 위치나 목적에 따라 다양하긴 하지만
대체로 한반도에 있는 20여개의 왜성들은 조선성들과는 전혀 다른 구조입니다
http://panzercho.egloos.com/10641611
어떤 블러거가 올려준 울산왜성 자료입니다
한마디 하고싶은게.. 슈도마스터님은 그 성에 일본색이 들어갈 기회가 없었다고 한적은 없던걸로 알고 있네요. 다만 그 성이 일본인이 기존의 성을 허물고 새로 지은게 아니라 기존의 성을 이용했다고 생각하신는 듯 한데.. 일단 여기에 관해선 슈도마스터님이 정확한 자료나 기록을 가져오셔야만 증명이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서울시티님의 '왜성에 일본색이 들어갈 기회가 없다고 하시는것 자체가 어폐입니다.' 이부분이 슈도마스터님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글이 왜곡되었다고 판단되는듯 합니다. 다시말하면 두분다 일본색은 있다고 생각하시는거죠.
마지막으로 두분께서 서로 견해가 다른 상황에서 두분의 대화가 매끄럽지 못한건 두분 모두의 자세가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박수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겠죠.
그래서 제가 계속 '애당초 일본인들이 지었다, 우리나라에서 짓지 않았다'라고 한것입니다.
더불어
'그 윤곽을 정하는 과정 (미로를 만든다거나 etc) 에서는 일본색이 들어갈 기회가 없었을 거라는게 요지입니다.'
이문장을 어떻게 이해 하실겁니까,
애당초 누가 옳고 그르고 따지려고 저렇게 토론을 한게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이유야 어쨌든간에 많은 분들께 이러한 모습 보여드려서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